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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끝나지 않은 전쟁, 대물림은 없다


  •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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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21-06-16 14:12:19

    ▲오산대학교 군사학부 김승우 교수 © 김승우 교수실

    김승우(오산대학교 군사학부 교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조영 함장, 해군사관학교 군사학 처장을 역임했다. 제1차 연평 해전에서 북한 어뢰정 격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다. 해군 대령으로 전역 후, 현재 오산대학교 군사학부 학과장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1949년 여름.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짙은 녹음이 깔린 지리산 계곡에 우리 국군이 빨치산 추격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낮이었지만 숲속은 초저녁처럼 검푸른 빛만 있었다. 김수근 중위(육사 7기)는 초대교회 목사님이신 아버지의 기도를 마음으로 되새김하며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토벌작전에 나서는 김 중위에게 아버지 김홍식 목사는 “어떤 고난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주님의 고통에 비기지 못하니 십자가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이겨내라”라고 축도해 주었다.

    사회주의로 무장한 빨치산들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하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국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의 주요 활동은 군경의 보급로 차단, 경찰서와 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교통망 공격, 우익 인사에 대한 암살 및 방화 공격 등이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그들의 수법은 매우 교활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김 중위가 마주했던 빨치산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위장, 저격, 트랩, HIT & RUN 전술 등 은 그들의 전유물 이였다. 이러한 적을 쫓으며 경계를 늦추진 않던 그때 총성이 울렸고 김 중위는 순간 고통을 느꼈다. 지휘관을 향한 저격이었다. 총알은 종아리를 관통했고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전 포항 인근 전선

    빨치산 작전의 현장에 있던 김수근 중위는 저격수의 총상을 이겨내고 대위로 진급하여 낙동강 방어전의 포항 전선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폭풍”이라는 작전명 하에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 국군은 소련이 북한군에 공급해 준 T-34 전차를 방어할 무기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유엔 안전 보상이 사회의 결의로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했지만 전세는 쉽게 만회되지 않았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낙동강 일대까지 영토를 내어주고 말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 - 왜관 - 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방어태세에 임하였다. 북한군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 작전을 감행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섰다. 낙동강 전선의 마산, 창녕, 왜관, 다부동, 영천, 기계, 안강, 영덕, 포항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조선인민군 사단 몇 개가 산악 지역을 통과해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하자, 대구로 이어지는 유엔군의 주 보급선이 위치한 포항 인근의 거친 산악 지형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2주 동안 유엔군과 북한군은 격렬한 교착전을 벌였으며 포항을 뺏기고 빼앗는 전투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는 북한군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전 전투에서 압도적 수와 장비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과는 달리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인해 보급로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김수근 대위는 이 전투에서도 다리에 2발의 총상을 입었다. 빨치산 전투의 총상이 채 다 아물기도 전에 두발의 총상을 더 당한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남과 북 양측이 벌인 혈전은 1950년 9월 말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약 2개월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지역에 따라서는 자칫 방어선이 돌파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국군, 유엔군을 비롯하여 우리 국민들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나 되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전쟁을 초기에 종결하여 남한을 점령하려는 북한의 전략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며, 전 병력을 집중했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낙동강 방어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전쟁 발발 97일 만에 잃어버린 수도 서울을 되찾고 전쟁 이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6.25전쟁의 최대 위기이자 대한민국에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낙동강 전선은 김수근 대위와 같은 군인과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졌다.


    1992년 4월 어느 날 오후, 강원도 고성 앞바다.

    김승우 대위(해사 39기)는 대한민국 해군 1함대 소속의 고속정 정장으로서 근무 중이었다. 옅은 해무속에 파도가 잔잔한 어느 날 김 대위 고속정 편대는 사격 훈련을 위해 기동하고 있었다. 모의 표적을 향해 40mm 함포가 발사되려는 순간 통신기에서 긴급한 무선이 들려왔다. 한국 어선 1척이 NLL로 향하고 있으며 항로 변경 조치를 위해 경고사격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위는 순간 긴급 상황임을 느꼈다. 현장으로 가기 위해 엔진을 전속력으로 올리고 함수를 북쪽으로 잡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북쪽 수평선에 희미한 어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선은 이미 NLL을 넘어간 후였다. 김 대위는 “어부를 구하는 것이 먼저이고 긴급 상황 하에 상부의 지시를 기다릴 수 없다"라고 판단하고 주저 없이 NLL을 넘었다.

    김 대위는 NLL을 넘는 순간 함체에 기대어 기도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아멘.” 어선은 북한 수역으로 16km를 넘어간 후에 가까이 접근한 김 대위 고속정을 보고 멈췄다. 선장은 항로 착오였다고 진술했다. 김 대위는 어선을 호위하며 약 1시간여를 남하해 마침내 한국의 바다로 넘어와 구조작전을 완수했다.

    남과 북이 나눠져 경계선도 없는 바다에서 북한 수역으로 넘어간 우리 어선을 목숨을 걸고 구하기 위한 이런 작전은 우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분단된 국가는 많이 있었지만 바다를 둘로 나눠 경계선을 긋고 모든 통항이 불가했던 바다는 한반도의 동해와 서해가 유일할 것이다.

    1999년 6월 15일 아침. 서해 연평도 근해.

    김승우 소령은 고속정 편대장으로서 예하에 2척의 고속정을 지휘하며 NLL을 무실화 하기 위해 남하한 북한 경비정을 추격하고 있었다. 북한 경비정의 남하로 긴급 출항을 하며 기지를 떠날 때 김 소령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도로서 작전을 시작했다.

    통신기에서는 “침착하며 담대하게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면 단호하게 작전하라”라는 2함대 사령관의 음성이 들려왔다. 2함대 지휘관들은 사령부 교회에서 영적으로 단단한 결속을 맺고 있었고 늘 같이 기도하고 있었다. 사령관의 담담한 작전지시 속에는 그의 진실한 기도가 담겨 있음을 100km가 떨어진 바다에서조차 모든 지휘관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우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두려움이 없고 우린 하나님의 품안에서 작전을 하고 있음을 뚜렷이 느끼고 있었다. 제1차 연평 해전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결과는 우리의 대승이었다. 북한군은 어뢰정 1척이 침몰되고 5척이 파손되었으며 사상자는 50여 명(전사 20, 부상 30)이 발생하였다. 김승우 소령이 지휘한 고속정 편대는 40미리와 20미리 함포로 북한군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고 적 장병 전원을 수장시키는 전과를 거뒀다.

    2021년 6월. 대한민국 어느 대학 강단.

    김승우 교수는 36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군 간부를 지양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북의 도발 실상을 알리고 실전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다음 전투는 여러분 몫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은 현장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으니 눈이 초롱초롱하다. 하지만 김 교수의 마음은 편치 않다. 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결국에는 후손들에게까지 넘겨줘야 한다는 현실 때문이다.

    앞에서 기술한 북한과의 여러 전투와 작전은 나와 내 아버지의 실전 경험이다. 빨치산 전투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1년에 걸친 북한 사회주의와의 전투 참전 이야기는 대한민국에서 흔한 이야기 일 수 있다. 2대에 걸쳐 전쟁을 치르고 있는 가정이 비단 나의 집안 이야기기 만은 아닐 것이며 심지어 3대, 4대까지 이 전쟁을 물려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가정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전쟁은 불행하게도 앞으로 몇 대가 더 계속될지 모른다. 6.25전쟁은 분명히 끝나지 않은 체 현재 진형형으로 남아있고 우린 이 비극을 언제까지 대물림해야 해야 하는지 기약이 없다.

    끝나지 않는 전쟁,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북한은 제1연평해전 이후에도 끊임없는 도발을 계속하며 우리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또한, 근래에는 핵무기 개발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도무기 실험, 사이버 공간에서의 공격 등을 자행함으로써 과거와는 다른 군사적 위협들이 우리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미래에도 이런 상황은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6.25전쟁의 당사자인 북한이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은 적화통일이라는 큰 틀 속에 있다. 3대를 잇는 ‘김 씨 왕조’를 거치며 적화통일을 위한 북한의 전술은 바뀐 적이 있어도, 목표 그 자체는 한번 도 바뀐 적이 없다.

    대남적화통일노선을 체제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노동당 규약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우린 잘 알고 있다. 이것은 21년 1월에 열린 북한의 노동당 8차 당 대회에서 재차 확인되었다. 북한은 8차 대회 5일차 회의에서 '조선노동당 규약 개정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고, "공화국 무력을 정치사상적으로, 군사 기술적으로 부단히 강화" 한다는 내용을 새로 넣었다. 이는 핵전쟁 억제력과 자위적 국방력 강화 입장을 제도화, 공고화하겠다는 의미이며 군사적 우위에 입각한 통일 추진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핵과 미사일에 기반한 우월한 국방력으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겠다는 노선을 확인한 셈이다.

    71년에 달하는 불안정한 휴전 상태에서 기인한 불안과 증오, 군사적 긴장이 우리 국민들의 삶을 지배해왔다. 세계가 탈냉전의 시대를 맞은 이후에도 한반도는 줄곧 군사 패권의 각축장이 되어 핵 군비경쟁과 확산을 촉발하는 도화선 구실을 해왔다. 이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때가 되었다.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 그리고 자손에게로 이어지는 민족적 비극은 이제 종식해야 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외교적 차원의 공조나 접근과는 별도로 북한의 직접적 안보 위협을 확실히 제어할 수 있는 군사 역량 강화가 우선 필요하다.

    육해공 연합작전 능력 배가와 더불어 동·서해 지역에서 첨단 무기로 무장한 해군력 증강, 북한의 오판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전략 기동 군으로서의 해병대 전투력 제고도 획기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전쟁 준비가 아니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다.


    베타뉴스 정승임 기자 (happywoman118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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