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설

[칼럼] 벌크, 그레이 그리고 병행수입


  • 김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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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2-04-30 11:08:41

    요즈음 물가가 난리다. 휘발유는 리터당 2천 원을 넘어선지 오래. 정부에서는 FTA가 발효되면 소비자 물가가 떨어진다고 말하지만, 마트에 나가서 장을 한 번만 보아도 그것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고 환율, 고 유가에 직격탄을 맞은 탓이 크다. 게다가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우리 실정에서는 올라가만 가는 원자재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에서는 소비자 가격을 낮추는 방안의 하나로 이른바 병행수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병행수입이라는 국내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는 공식 수입업체가 아닌 현지 수출 도매상, 이른바 홀셀러(Whole Seller)를 통해 국내 유통업체가 수입하는 것을 말한다.

     

    보도에 따르면 국내 병행수입 시장은 주로 국내외 값 차이가 큰 의류, 잡화, 화장품 등 해외 유명브랜드 제품을 중심으로, 연간 약 1조원 정도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조사 기관마다 다르지만 부동산과 유류를 뺀 소매시장이 연간 2-300조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적잖은 규모. 더 이상 커지지 않는데에는 정식 수입원에 비해 약점인 AS나 이른바 짝퉁 여부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정부의 적극적인 독려로 최근 들어서는 대형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늘어나고 있는 모양새다.

     

    가격차이가 있다 보니 국내 독점 판매채널의 고마진에 소비자들의 비난이 집중된다. 한마디로 왜 해외보다 비싸게 파느냐는 것이다. 물론 유통업체로서도 할 말은 많다. 많은 제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글로벌 홀셀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한국 시장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다보니 비용이 올라가고, 여기에 각종 마케팅 비용이 더해진다는 설명이다. 세금도 한몫을 차지한다. 

    <CPU는 벌크가 많은 대표적인 제품이다.>

    그런데 IT분야로 이를 돌리면 좀 사정이 다르다. 먼저 벌크(Bulk)라는 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전적 의미로 대량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벌크는 주로 IT분야에서는 대형 제조사나 조립업체를 위한 제품이라는 뜻도 가진다. 그동안 이 시장을 주도하던 것은 뭐니 해도 CPU다. 상대적으로 값도 비싸고, 크기가 워낙 작아 운송비 등에서 매우 유리한 덕분이다. 게다가 고장도 그리 많지 않으니 판매원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제품을 찾기 힘들 정도다. 상대적으로 수요가 많고 역시 부피가 작은 하드디스크 역시 이런 벌크 유통의 주력 품목이다.

     

    <국내 유통사로서는 정품 캠페인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격 차이가 발생할까? 국내 유통사가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앞서 설명한 의류 등이 주로 구매력, 그러니까 대량 구매를 통한 가격차이가 생기는 것처럼, 벌크는 주로 대형 제조사 등의 납품에서 생긴다. 한 두 대도 아니고 수십, 수백만 대씩 제조하는 제조사에게 일반 소비자와 같은 값을 매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싼 값으로 제품이 공급되는데, 이 부품들이 100% 내부소비가 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완벽한 예측은 힘들다. 이렇게 남은 자재들을 반품하는 대신 이른바 현물시장에 파는데 이런 제품들이 흔히 말하는 벌크 또는 그레이다.

     

    이런 벌크도 나눠보면 복잡하다. 예전에 ODD가 한참 유행이던 시절에는 주로 국내산 제품들을 다시 수입해서 파는, 보다 정확히는 수출용 제품들을 국내 시장에 파는 역수가 유행한 적이 있다. CPU나 하드디스크의 경우는 포장 상태 때문에 트레이(Tray)라고도 불린다. 모두 비슷한 것들이다. 정품이 아니라는 의미로 그레이(Gray)라는 말도 쓴다. 

     

    그동안 CPU와 하드디스크에서만 보이던 벌크 제품들이 요즈음 들어서는 마우스 등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역시 크기가 작고 대량 납품에서 빠져 나오는 것들이다. 예전에는 용산 벼룩시장 등에서 볼 수 있었지만 요즈음은 아예 벌크 제품이라고 밝히고 오픈마켓을 중심으로 팔린다. 심지어 정품(正品)이라는 이름도 서슴지 않는다. 짝퉁이 아니라는 뜻이란다. 

     

    <요즈음은 마우스도 당당히 벌크 대열에 합세했다.>

     

    옷이나 화장품과 달리 IT 제품에서 짝퉁은 그리 많지 않다. 라이프 사이클이 짧고, 명품시장이라는 것이 없는데다가, 여간해서는 짝퉁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IT제품에서는 AS에 문제가 집중된다.

     

    그냥 값이 싸다는 이유로 샀다가 문제가 생기면 정식 판매원 AS센터를 방문하면 거의 100% 거부당하기 일쑤다. 뻔히 벌크제품인줄 알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찔러보자는 소비자들도 있고, 복잡한 유통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비자들도 있다. 유통경로는 어찌되었건 결국 같은 회사에서 만든 제대로 된 제품인데 왜 AS를 차별하냐고 항의하는 소비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팔지도 않은 제품을 단지 정식 유통업체라고 AS해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정식 수입원들의 항변이다. 여기에 이들 제품은 세금 탈루 문제도 존재한다. 정식 수입이 아닌 까닭이다. 앞서 설명한 역수 ODD가 대표적이다.

     

    <온라인에서 판매가 많아지자 상품페이지에 공식 판매점 문구를 삽입하는 수입원이 늘고 있다.>

     

    앞으로 IT 제품 역시 병행수입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값을 내리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들여온 제품은 끝까지 책임져야한다. 안 그래도 힘든 유통회사들은 기존 벌크나 그레이는 물론, 이제는 병행수입제품과도 싸워야 할 참이다. 이 과정에서 선량한 소비자들의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베타뉴스 김영로 (bear@bet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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