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설

[칼럼] “우리 상표로 된 완전 수입품”


  • 김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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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2-03-05 11:08:59

    요즈음 그래픽카드는 다른 어떤 컴퓨터 부품보다도 가장 심한 양극화를 보이는 제품이다. 시장 조사기관인 존 페디 리서치(Jon Peddie Research) 등의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11년도 4분기 시장 점유율 자료와 인텔 조사 기관들의 발표를 종합해 보면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난다.

     

    내장 그래픽이 100%를 차지하는 인텔이 전체 시장의 59.3%를 차지하고 있고, AMD가 24.8%, 엔비디아가 15.7%를 차지한다. 인텔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AMD와 엔비디아의 비율은 흥미로운데, 이는 엔비디아가 내장 그래픽 시장에서 철수한 까닭이 크다. 반대로 생각하면 AMD 그래픽시장 점유율의 상당 부분이 내장 그래픽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외장 그래픽카드만 보면 AMD와 엔비디아의 비율은 36.3% 대 63.3%로 여전히 엔비디아가 앞선다.

     

    이 자료를 좀 더 깊게 살펴보면 앞서 설명한 양극화가 이해가 간다. 즉,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제 적어도 60%가 넘는 소비자들이 내장 그래픽을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인텔이 샌디브리지 칩셋을 선보이면서 내장 그래픽을 강제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숫자 자체를 왜곡시키기도 하지만, 이것을 빼고 나더라도 예전에 비해 월등해진 성능의 내장 그래픽을 별다른 무리없이 소비자들이 받아들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팔리는 그래픽카드는 예전에 비해 한결 고급화가 되었다는 것이 시장의 반응이다. 가장 잘 팔리는 그래픽카드는 15만 원 정도의 제품들로 예전에 비해서는 아주 고급스러워졌다. 즉, 아예 내장 그래픽카드를 쓰던지, 기왕 그래픽카드를 사는 경우라면 고급제품을 산다는 뜻이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은 여전히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이와 함께 시장 역시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작년 한해를 돌아보면 그래픽카드 시장만큼 유통사들의 부침이 심했던 시장을 찾기 어렵다. 유독 수입 브랜드들의 공세가 심했는데, 그동안 유통사를 거쳐 판매되던 제품들이 직접 팔을 걷고 국내 지사를 설립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그래픽카드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적잖은 변화다.

     

    이미 컴퓨터 부품의 대부분을 대만과 중국산에 의지하는 우리 시장에서 그래픽카드는 조금 독특한 발걸음을 보여주는 부품이었다. 비슷한 성격의 메인보드가 이른바 토종 제품이 전멸했을 때도, 그래픽카드는 제이스텍, 슈마, 인사이드TNC 등의 제조사들이 제품을 생산하고 심지어 소량이기는 해도 일본 등에 수출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이들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은 무난히 코스닥 시장에 상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한 토종 제조사들은 사라지고, 이제 토종 유통사들만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생산은 글로벌 제조사에 맡기고 브랜드만 살아남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래픽카드 시장이다. 수많은 수입 브랜드 그래픽카드의 공세 속에서도 토종 그래픽카드 회사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심지어 아직까지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는 비결로 국내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적극적인 마케팅과 다양한 제품군, 차별화된 고객지원 등을 꼽는다. 이는 분명 외산 기업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장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냉정한 시각으로 보면 생산을 위탁하는 까닭에 포장을 제외하고 제품 자체는 같다는 것이 사실이다. 제품 디자인보다는 박스 디자인이 더 훌륭하다는 쓴 소리가 있을 정도로,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알맹이는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토종 브랜드로는 2위 규모를 자랑하던 회사가 사실상 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철수한 일도 있었다.

     

    지금은 파산 신청을 한 코닥과 후지필름이 필름 시장을 양분하던 시절, 당시 토종 브랜드를 내세운 한 필름회사의 광고카피는 “우리 상표로 된 완전 수입품”이라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문구였다. 즉, 품질은 외산이지만 우리 상표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른바 애국심마케팅의 일환인 셈이었다. 80년대에는 통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요즈음에는 불가능한 소리다.

     

    올 해는 작년 한 해 시장에서 그리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던 그래픽카드 칩셋 제조사 AMD와 nVidia의 차세대 그래픽카드 출시와 함께, 작년부터 물꼬를 튼 수입 브랜드들의 공세가 더 심해질 것으로 전망하는 이들이 많다. 이미 지사를 만든 회사들 말고도, 작년말, 올해 초에 새롭게 문을 열거나 한국시장에 직접 진출을 고려하는 회사들 역시 꾸준히 한국시장을 주시하고 있다. 콘솔보다는 PC기반의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 고급 제품을 적정 규모로 팔 수 있는 시장인 까닭이다. 쿨러로 잘 알려진 잘만이 새롭게 시장에 뛰어든 것도, 쿨러와의 연계라는 특수성도 있기는 하지만, 분명 시장이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과연 토종 브랜드가 이들의 파상공세를 어떻게 막아내고, 또 다른 시장을 창출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이제 더 이상 멋진 박스만으로 외산 브랜드와 경쟁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베타뉴스 김영로 (bear@bet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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