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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 3부작. 온라인게임 여명, '리니지가 있었다!'

  • 이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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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1-12-21 18:18:51

    한 달에도 수십 개 쏟아지는 온라인게임들을 보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게임들의 자리다툼이다. 마음먹고 게임을 깔아도 이내 실망하고 휴지통으로 날려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동접자와 매출을 논하기 전에 유저의 PC에서 얼마나 버티느냐가 관건이 됐다. 시장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자는 많다.

     

    13년 전 이맘때가 그랬다. RTS로 세계를 평정한 웨스트우드와 블리자드는 동양의 엘도라도 한국으로 격전지를 옮겼다. 듄2, 워크래프트, 커맨드앤컨커, 스타크래프트... 공룡들 간의 RTS전쟁은 1990년대 게임시장의 이슈였다.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국내 게임업계도 열병처럼 RTS바람이 불었다. 설상가상 한국 경제는 IMF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는 시기였다. IT벤처가 살아남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다.

     

    여기서 게임 업계에 겁없는 청년이 등장한다. 당시 31세인 그는 일류대학 출신의 대기업 사원이라는 명함을 버리고 벤처의 격랑으로 몸을 던졌다. 꿈과 열정... 그가 가진 전부다. 같은 이력을 지닌 또래의 엘리트들은 그를 비아냥 거렸다.

     

    “게임? 그거해서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겠냐?”

     

    그는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성공을 향한 열정도 가졌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그가 확신하는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리니지와 엔씨소프트의 뿌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온라인게임시장의 여명기, 그곳에 리니지가 있었다>

     

    “저는 인터넷을 사람들이 같이 즐겁게 생활할 수 있는 즐거움과 문화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인터넷을 정보의 망으로 알고 있을 때 저는 엔터테인먼트의 망으로 보았죠”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인터넷+즐거움=? 그 해답을 리니지에서 찾았다>

     

    온라인 게임? '인터넷 + 즐거움

    리니지의 시작은 시대의 요구였다. 98년 당시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망이 급속도로 보급 됐다. 마치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기 때와 비슷했다. 고속 인터넷 망은 엄청난 속도로 전국 곳곳을 파고 들었다. 다음, 한게임 등 인터넷 사업자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인터넷은 시대의 화두였다. IT시장의 선구자들은 난생 처음 격어본 변화의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다음, NHN 같은 회사는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로 보고 포털을 만들었다. 안철수연구소는 백신을 만들어 인터넷 시장의 수호자가 됐다. 네오위즈는 세이클럽 같은 채팅 프로그램을 만들어 소통의 혁명을 가져왔다. 엔씨소프트는 무엇을 보았을까? 김택진 대표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의 망, 즉 재미의 바다로 해석했다. 정보나 소통 못지 않게 즐거움이 들어가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소신이다.

     

    그가 구현하려는 건 게임이 아닌 인터넷속의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게임을 선택했다. 현대전자를 거쳐 한글과 컴퓨터에서 근무한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 386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유저는 누구나 했을 법한 한메타자교사도 김 대표의 작품이다. 김 대표는 현대전자 연구소에서 IT솔루션을 연구하던 10여 명의 엔지니어와 함께 독립해 회사를 세웠다. 엔씨소프트가 출항의 닺을 올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부터 온라인 게임 개발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엔씨소프트는 게임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로 시작했다. 시스템 통합업무와 국방부, SK, 천주교구 홈페이지 제작 등 가리지 않고 하청을 맡았다. 다른 일을 맡아 할수록 '꿈'은 멀어져 보였다. 목표는 있는데 그것을 이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송재경과 리니지를 만나기 전이었다.

     

    <김택진 대표과 송재경 대표의 만남. 한국 게임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 당시 회사가 개발을 막 시작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투자자를 찾아봤지만 돈을 줄 사람은 없고, 결국은 리니지를 원래 목표대로 개발하지 못할 상황이었죠. 회사가 어렵다보니 어쩔 수 없이 집 팔고, 그 돈 빼서 직원들 월급주고, 나중엔 서버 살 돈만 남더라고요.”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김택진, 송재경과 만나다

    업계 정상의 엔씨소프트도 한때 직원 월급을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갈수록 상황은 어려워졌다. 당시엔 소프트맥스 같은 PC게임 개발사가 주류였다. 소트프맥스는 창세기전시리즈로 대박치고 일찌감치 코스닥에 입성했다. 승승장구하는 PC게임과는 달리 온라인게임은 아직 비주류였다. 일부 마니아들이나 즐기는 하드코어 장르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 온라인게임에 선뜻 주머니를 열겠다는 투자자는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다. MMORPG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만들어 본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이 시설, 김 대표가 밝힌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있는 돈 다 털어 직원들 추석 보너스 주고 나서 집에 들어갔더니 깜깜한 방에 아이 혼자 자고 있더라고요. 만약 일(사업)이 잘못돼서 (감옥에)들어가면 (나 없는 동안)부모님이 잘 키워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죠”.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기회를 만난다.

     

    필자는 한국 온라인게임 역사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들라면 김택진과 송재경의 만남을 첫순위로 꼽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은 것 처럼 드라마틱하다. 리니지를 만든 송재경 대표도 대단하지만, 그를 알아보고 과감히 투자 한 김택진 대표의 배포와 안목도 탁월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 온라인게임은 적어도 5년은 늦었을 것이다. 카이스트를 나온 송재경 씨는 동창생인 김정주 씨와 넥슨을 공동 창업하고 세계최초의 머그게임 바람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는 넥슨을 김정주 대표에게 맡기고 회사를 나와 또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96년, 청년 송재경은 아이네트란 회사에 MMORPG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것이 리니지의 효시다. 하지만 리니지 개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몇 번이나 좌초위기를 겪었다. 회사에서도 반기질 않았다. '차라리 콘솔이나 PC게임을 만들지!'.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리니지 프로젝트를 본 김택진 대표는 무릎을 쳤다. 이것이 그가 꿈꾸던 이상과 가장 가까운 게임이다.

     

    97년, 송재경 씨는 엔씨소프트에 입사해 리니지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둘 다 벼랑 끝의 절박한 심정으로 게임을 완성했다. 그때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중 블레이드앤소울을 개발한 배재현 전무도 있었다. 리니지 개발팀은 한국 온라인게임 거목들을 키워낸 산실이었다. 엑스엘게임즈에서 만난 송재경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콘솔게임은 만들기 힘들고, PC게임은 너무 많고, 우리의 경쟁력은 온라인게임 밖에 없었죠. 솔직히 그때는 '리니지'란 게임이 어떻게 나올지 개발자 자신들도 몰랐어요. 일단 만들어서 유저에게 내놓자. 그런 각오였죠."

     

     

    <리니지 저격수로 나섰던 드래곤라자 온라인과 라그나로크, 결국 리니지를 꺾진 못했다>

     

    “MMORPG는 말 그대로 여럿이 모여서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입니다. 단순히 몹 잡고 아이템 먹는 게임이 아니죠. 이용자들이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나가는 게임. 개발자가 만든 콘텐츠 외에 다른 걸 더 많이 할 수 있는 게임, 그것이 MMORPG죠”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게임시장을 바꾼 리니지 쇼크

    엔씨소프트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할 방법까지 알았다. 그리고 게임 개발에 일로매진했다. 리니지는 2년여의 개발 기간과 10개월의 테스트 기간을 거쳐 1998년 9월 첫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비로소 리니지 열풍이 시작됐다.

     

    서비스 2개월 뒤 동시접속자 1000명 돌파하더니, 1999년 12월 1만명, 2000년 12월 10만명, 2001년 12월 30만 명을 넘어섰다. 리니지는 게임 시장에서 그야말로 '쇼크'였다. 단순한 인기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김택진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유저가 회사에 찾아오더니 아이템을 구입하려다 사기를 당했다고 하소연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 그때 우리 게임의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 된다는 걸 처음 알고 놀랐습니다." 리니지 쇼크는 개발자들도 생각치 못한 엄청난 쓰나미를 몰고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리니지의 어떤 매력에 빠졌을까. 그 해답은 송재경 대표의 게임철학에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리니지는 여백의 미를 살린 동양화 같은 게임이다. 개발자가 공급한 콘텐츠를 유저가 소비만 하는 수동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유저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 또하나의 '월드'다. 유저들은 게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자신들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혈맹에 충성하고 상대편과 전쟁을 펼치는 독특한 계급구조를 보여주는데, 이는 다른 게임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서버마다 스토리가 다르다. 콘텐츠는 똑같지만 그곳을 일구는 유저의 스토리는 제각각이다. 죽도록 싸움만 하는 서버도 있고, 평화롭게 레벨업만 하는 서버도 있다. 서버에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면 유저 스스로 이를 바로 잡는다. 운영자는 유저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고 조력만 할 뿐이다. 수동적 플레이에 길들여진 유저들은 리니지의 능동적 플레이의 맛보고 열광했다. 이것은 엄청난 파괴력이다. 리니지 쇼크는 전국에 보급된 PC방 물결을 타고 들불처럼 번졌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리니지 콘텐츠, 리니지 운영은 항상 중용의 미덕을 지켰다> 

     

    포트리스는 없고, 리니지는 있는 것

    1990년대 말, 게임시장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스타크래프트 시대였다. 스타가 맹위를 떨치던 당시, 리니지는 생애 첫 라이벌이자 파트너를 만난다. 1999년 CCR이 만든 캐주얼게임 포트리스2다. 포트리스는 MMORPG와 함께 게임 시장의 양대산맥으로 맥을 잇는 캐주얼장르의 원조격 게임이다. 

     

    포트리스2의 위력은 대단했다. 쉽고 아기자기한 게임성은 여성과 젊은 유저들을 모니터 앞으로 불러모았다. PC방에선 스타크래프트, 리니지, 포트리스의 삼파전이 치열했다. 리니지와 포트리스는 외산게임 스타를 견제하고, 한편으로는 경쟁하면서 한국 온라인게임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두 게임의 운명은 갈렸다. 포트리스는 포트리스3, 블루, 레드 등 수많은 시리즈들을 내놓으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유저들은 쏟아지는 시리즈물에 피로감을 느꼈다. 결국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에게 캐주얼 대권을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리니지는 MMORPG 맹주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콘텐츠의 균형을 맞춘 덕분이다.

     

    리니지는 콘텐츠를 남발하지 않았다. 에피소드로 주제별로 나누어 정확히 업데이트했다. 더하거나 덜 하지도 않는다. 오직 유저가 원하는 만큼만 내놓는다. 그래서 유저들은 리니지에서 늘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작년, 파격적인 콘텐츠로 리니지의 중흥기를 가져왔던 '바포메트' 업데이트도 결국 유저들의 요구를 정확히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운영의 묘미는 리니지 13년 생존의 비결이다.

     

    포트리스 이후, 리니지는 수많은 도전을 받았다. 삼성이 서비스 한 드래곤라자 온라인, 캐주얼 MMORPG 대표작 라그나로크 온라인,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미르의 전설2등 걸출한 후배들이 도전장을 냈지만 리니지의 아성을 넘진 못했다. 이미 리니지는 정상의 궤도에서 도전자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올랐다.

     

    <비운의 걸작 포트리스2, 리니지와 함께 한시대를 풍미했었다>

     

    “(대만 성공 후)중국에서도 우리가 잘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완전히 참패였죠. 게임이라는 게 단순히 재미로서가 아닌 문화로써 먼저 자리를 잡고 들어가야지만 성공한다는 것을 배웠죠.”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해외 진출의 아픔 길드워로 극복하다

    2000년 초반, 리니지는 스타의 아성을 넘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코스닥에 상장한 엔씨소프트는 성공한 IT회사로 이름을 알렸다. 다음 차례는 해외진출이다. 시작은 좋았다. 리니지는 대만에 진출해 대박을 쳤다. 대만 현지의 국가인터넷 망을 몇 번이나 다운시킬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어찌 보면 한류게임 1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선 달랐다. 같은 중화 문화권인데 대만은 되는데 중국은 안됐다.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제품만 수출하는 건 한계가 있다. 게임은 문화 상품이기 때문에 현지의 문화까지도 아울러야 한다. 중국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엔씨는 곧바로 해외전략을 수정했다. 미국 진출에 앞서 미국의 문화를 잘 아는 현지 개발자를 영입했다.

     

    미국의 히어로 문화를 살린 '시티오브히어로'를 성공시켰다. 길드워를 만든 아레나넷도 이때 엔씨소프트가 발굴한 회사다. 엔씨소프트는 동양에선 리니지, 서양에선 길드워를 내세워 글로벌 게임업체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해외에 집중하는 동안 격동의 게임시장은 다음 세대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3D월드로 한국 게임시장을 바꿔보고 싶었다!”

     

    김택진 대표의 이 한마디에 한국 게임시장은 요동쳤다. 리니지 6년 후, 엔씨 가문은 또 다른 시험대 위에 올랐다. 바야흐로 3D시대! 시장의 차원이 달라졌다. 2D를 리니지가 개척했다면, 3D는 리니지2는 지켜야 한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빅3 같은 강력한 라이벌들이 차례차례 숨통을 조여 왔다. 그리고 바츠 해방전쟁이라는 유례없는 역사가 펼쳐진다. 다음 편엔 엔씨가문 2세대 리니지2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6년 후, 엔씨가문 2세대는 리니지2의 어깨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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