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칼럼

[칼럼] 불혹의 나이에 찾아온 리니지 '회귀본능'


  • 이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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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1-12-12 20:05:09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 송년회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회사 그만두면 뭐 할 거냐” 생각 할수록 답이 없다. 그때마다 나는 늘상 이렇게 말한다. “고향 내려가서 농사나 짓지 뭐”

     

    요즘 시대에 농사짓는 게 말처럼 쉬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친구는 ‘고향’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대화는 게임이야기로 자연스레 흘렀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요즘에 게임 좀 하냐?”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하긴, 게임에 흥미를 잃을 나이도 됐다. 날고 기는 초딩들 이겨 보려고 이리저리 수선떠는 것도 지칠때다. 그렇다고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임도 없다. 대답이 곤궁해 질 터이다. 그럴 때 녀석이 하는 말. “리니지나 다시 하지 뭐”. 이것 저것 해봤는데 리니지만한 게임이 없다더라.

     

    리니지가 서비스 된 지 13년이 지났다. 사람으로 치면 이제 중학교 들어갈 나이지만, 게임으로 치면 환갑을 훨씬 넘은 노년이다. 단순한 2D그래픽, 불편한 인터페이스, 느린 속도감... 쌈박한 요즘 게임에 비하면 이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은 많다. 포털 게임 검색어에도 늘 10위권 안이다.

     

    또래의 게임들은 벌써 무덤 속으로 들어갔는데, 혼자만 젊은 게임 못잖게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업데이트도 자주하고, 커뮤니티도 활발하다. 엔씨소프트의 장남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 업계에선 리니지 장수비결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 ‘대규모 업데이트’, ‘유저 중심의 운영’, ‘소통과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파워’ 등 여러 가지 요인을 꼽는다. 맞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리니지 13년 인기를 견인했다.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설명하지 못할 지점이 있다.

     

    사실 리니지 만큼 회귀본능이 강한 게임은 드물다. 리니지를 했던 사람들은 "게임을 접을 수는 있어도 지우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다른건 다 지워도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 정도는 꼭 PC에 남겨 놓는다. 언젠가 다시 와서 하겠다는 의미다.

     

    리니지 하나만 죽어라 파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최신 게임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기는게 유저들의 마음이다. ‘리니지2’, ‘와우’, ‘아이온’이 나올 때도 사람들은 리니지를 떠났다. 그때마다 ‘리니지 위기론’이 대두됐다. 하지만 이 우직한 노장게임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상관없다. 굵직한 업데이트 소식이 들릴 때마다 ‘다시 시작해 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하던 게임이었으니까.

     

    우리나라 온라인게임 1세대 유저들은 대부분 리니지로 게임을 시작했다. 온라인게임이란 단어조차 낮선 그 시절, 리니지는 우리의 정서가 들어간 첫 국산 MMORPG다. 좋든, 싫든 리니지에서 온라인게임을 처음 맛본 사람들이 대다수다.

     

    말하는 섬에서 PK 당해 분노하고, 첫 공성전에서 승리했던 환희를 사람들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리니지는 게임의 범주를 넘었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사이버 세계의 ‘고향’같은 곳이 되버렸다. 투박한 그래픽에 노가다는 여전하지만, 그 속에는 함께 즐겼던 사람들의 체취가 남아있다. 그래서 리니지는 사람에 대한 추억이 많은 게임이다.

     

    리니지 개발자도 지난 13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포세이든이 게임을 접은 사건을 꼽았다. 포세이든은 리니지 최고 레벨의 캐릭터로 게임 내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유저다. 동접자 10만명 달성, 1조원 매출돌파 같은 거창한 성과를 꼽을 줄 알았는데, 한 유저의 탈퇴를 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이런 추억들이 퇴적층처럼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리니지를 만들었다.

     

    제법 송년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어느새 과거 고락을 같이 했던 혈원들이 모여 있었다. 혈맹장을 했던 피시방 형님을 비롯해 내 쫄캐릭터로 다녔던 비료공장 사장님, 공성전때 성문 앞에서 함께 칼질했던 포크래인 운전기사 아저씨, 각기 다른 이력의 혈원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게중엔 리니지를 하는 사람도 있고 떠난 사람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리니지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모른다.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PC에서 자고 있는 리니지를 깨워보고 싶다.




    베타뉴스 이덕규 (press@bet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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