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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주년 특집] 간추린 인터넷·포털 10년사


  • 방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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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09-09-16 17:41:44

    베타뉴스가 올해 9월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윈도우 관련 커뮤니티로 첫 걸음을 뗀 베타뉴스는 이미 어엿한 온라인 IT&GAME 대표 미디어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베타뉴스는 지난 10년 동안 인터넷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각종 최신 정보를 발 빠르게 전했다. 오늘날의 베타뉴스가 있기까지는 인터넷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베타뉴스의 10년은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립 10주년을 맞아 베타뉴스가 지난 10년 동안 인터넷 및 포털 사이트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정리해 봤다. 과연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 10주년을 맞은 베타뉴스는 인터넷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보급으로 물꼬 튼 인터넷 라이프 = 1999년 이전에는 인터넷을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94년 인터넷 상용 서비스가 시작되긴 했지만 당시엔 PC 통신이 대세였다. 모뎀을 이용해 인터넷을 하기엔 속도가 너무 느린 데다 전화 요금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인터넷을 쓰는 사람도 PC 통신을 거쳐 SLIP 또는 PPP 프로토콜 기반으로 연결하거나 데이터 통신용 고속 전화회선인 014XY 서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굳이 복잡한 경로를 거쳐 낯설고 느린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 대신 VT 기반의 PC 통신에 매달렸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상용화 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매달 일정 금액만 내면 인터넷을 빠른 속도로 마음껏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료로 얼마든지 원하는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이 활성화 됨에 따라 PC 통신 서비스는 자연스럽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1998년 두루넷은 케이블 회선을 이용한 하향 10Mbps 초고속 인터넷을 선보였으며 KT도 ISDN(Intergrated Services Digital Network)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어 1999년 하나로 통신이 하향 최대 8Mbps 속도를 내는 ADSL(Asymmeric Digital Subscriber Line) 서비스를 시작했다. KT도 ADSL 서비스 개시로 응수했다.

     

    이후 2002년 VDSL(Very high-data rate Digital Subscriber Line)을 거쳐 현재는 100Mbps 급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보편화 됐다. 요즘엔 와이브로(WiBro, Wireless Broadband)와 HSDPA(High Speed Downlink Packet Access)를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즐길 수 있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덕택에 인터넷 이용자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2004년 8월엔 우리나라 인터넷 이용 인구가 3,000만 명을 돌파했다. 2009년 현재는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이용자만 따져도 1,600만 명이 넘는다. 우리나라가 인터넷 강국이 된 비결은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의 빠른 보급 덕분이라고 봐도 좋다.

     

    ◇ 인터넷, 지난 10년간 어떤 변화 겪었나 =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인터넷 세상도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지난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리해 봤다.

     

     1999년 - 정부는 1999년 3월 사이버 코리아 21(Cyber KOREA 21)을 수립했다. 정보화를 통해 창조적 지식기반 국가건설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식·정보화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이는 빠른 인터넷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인터넷 사용이 늘어나자 인터넷 주소자원 전담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정보통신부로부터 독립해 한국인터넷정보센터(KRNIC)가 탄생했다. 현 한국인터넷진흥원의 전신이다. 이후 6월 30일부터 개인 도메인 pe.kr의 등록이 시작됐다. 전자거래기본법과 전자서명법도 제정됐다. 인터넷 뱅킹 서비스도 이 때 시작됐다.

     2000년 - 2000년부터는 인터넷의 틀이 구체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초고속 정보통신망 2단계 사업 계획도 기틀이 잡혔다. 도메인 이름 등록 규정이 제정되었으며 한글도메인 서비스가 시범 운영됐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이 이 때 문을 열었으며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지식정보자원관리법이 제정됐다.

    2001년 - 사이버 코리아 21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2001년 드디어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기준 초고속망 구축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인터넷 이용자도 2,000만 명을 넘겼다. 인터넷 뱅킹 등록자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개인 도메인 복수 신청이 가능해졌다. 한국정보진흥원도 문을 열었다.

     

    2005년까지 전체 가구의 84%인 1,350만 가구에 평균 20Mbps급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동통신가입자에게 2Mbps급 이동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초고속 정보통신망 고도화 기본계획도 이 때 수립됐다.

    2002년 - 2002년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가입 1,000만 가구를 돌파했다. 같은 해에 향후 5년간 정보화 정책의 중장기 비전과 전략을 담은 E-코리아 비전 2006을 확정했다. 한국 게임 시장 규모는 3조 원을 돌파했다.

     

    인터넷 주소가 급격히 늘어감에 따라 kr 도메인 등록 대행 업무의 민간 경쟁 체제가 시작되었으며 IPv6 활성화 계획도 수립됐다.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전자정부 서비스도 공식 출범했다.

    2003년 - 개인의 전화번호를 인터넷 주소로 변환하는 e-번호(ENUM) 시험 서비스가 시작됐다. 한글.kr로 구성된 도메인 이름의 등록 접수도 개시했다. 전자상거래 규모가 200조 원을 뛰어넘었으며 모바일 뱅킹 서비스도 이 때 시작했다.

     2004년 - 인터넷 이용자 수는 3,000만 명을 돌파했다. 늘어난 이용자 덕분에 전자상거래 또한 탄력이 붙어 총 거래 규모가 300조 원을 넘었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가 한국인터넷진흥원(NIDA)으로 바뀌었다.

    2005년 - 한국인터넷진흥원은 국내 이동통신 3사와 함께 휴대전화를 이용한 무선 인터넷을 좀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한 모바일주소(WINC) 익스프레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복잡한 URL 입력 대신 휴대폰 키패드 숫자와 #(구분자), 그리고 고유번호만 눌러 손쉽게 접속할 수 있도록 했다.

     

    인터넷전화(VoIP)의 상용 서비스가 시작되었으며 와이브로(WiBro)가 국제 표준으로 인정 받기도 했다. 온라인 게임 시장은 1조 원을 돌파했으며 모바일뱅킹 이용자도 100만 명을 넘었다.

    2006년 - 2006년엔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가 대거 등장했다. 비록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FTTH(Fiber To The Home)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의 상용화가 이루어지며 100Mbps 고속 인터넷 회선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와이브로와 HSDPA 서비스도 상용화를 시작하며 고속 무선 인터넷 시대를 열었다.

     

    누구나 손쉽게 인터넷으로 쇼핑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온라인 쇼핑몰 거래액은 13조 원에 달했다. 모바일 민원증명발급 신청 서비스도 새롭게 시작했다.

     2007년 - 2단계 영문 kr 도메인 ‘퀵돔’이 06년 3단계 kr 도메인 등록자에 한해 신청 받던 것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동시 등록 접수를 시작했다. 퀵돔이란 kr 앞에 붙는 co, or, pe 등을 제거함으로써 입력 단계를 줄인 단축형 주소다. (예 nida.or.kr -> nida.kr)

     

    날로 늘어가는 악플로 인해 인터넷 실명제라고도 불리는 ‘제한적 본인 확인제’도 도입됐다.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10만 명 이상인 경우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언론사 사이트 등의 게시판에 글을 올리려면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의무화 한 것이다.

    2008년 - 초고속 인터넷 망을 통해 제공되는 양방향 텔레비전 서비스인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의 상용서비스가 공식 출범했다. 아무 때나 원하는 방송을 볼 수 있는 IPTV는 인터넷의 일반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 됨에 따라 이로 인한 문제가 슬슬 불거지기 시작했다. 옥션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인해 개인 정보 보안에 대한 불안감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악플로 인한 자살 사례가 늘어남에 따라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최초로 사이버 모욕죄가 도입되기도 했다.

    2009년 - 지난 7월엔 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DDoS, Distribute Denial of Service)으로 크게 혼쭐이 났다. 어느 나라보다 훌륭한 인터넷 환경을 갖췄음에도 불구, 이에 걸맞는 보안 대책은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DDoS 대란은 인터넷 보안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 인터넷의 또 다른 중심, 포털 사이트의 변화 = 인터넷을 말할 때 포털을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의 발전과 발맞춰 포털 사이트도 꾸준한 진화를 거듭해 왔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다음 커뮤니케이션즈다. 1995년 설립된 다음은 97년 무료 웹메일인 ‘한메일’을 서비스 함으로써 많은 사용자를 확보했다. 인터넷이 활성화 됨에 따라 이메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이들이 대거 가입한 덕분이다. 한메일은 1년 7개월 만에 100만 회원을 돌파했다.

    사실 다음은 포털 사이트라고 보기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처음엔 웹메일 서비스에 뉴스, 이메일, 증권 정보를 노출시킨 정도에 불과했다.

     

    1999년에 다음 커뮤니케이션즈는 ‘카페’ 서비스를 시작했다. 카페는 PC 통신 동호회를 대체하며 새로운 온라인 커뮤니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PC 통신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한메일과 카페 덕분에 다음은 2000년 초반 전성기를 누렸다.

     

    2002년부터는 네이버가 포털 1위 자리를 뺏으며 새로운 포털 시대를 열었다. 1999년 설립된 네이버는 2002년 10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C2C형 검색 서비스 ‘지식iN' 덕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며 대표 포털로 거듭나게 된다.

     

    여러 차례 합병을 거쳐 덩치를 키운 네이트 또한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루며 포털 3강에 합류했다. SK텔레콤이 2001년 10월 개설한 네이트닷컴은 2002년 라이코스코리아를 인수하며 SK커뮤니케이션즈로 분사했다. 2003년 8월 싸이월드와 합병하고 2006년 3월엔 이글루스를 인수했으며 2007년엔 엠파스까지 인수했다. 그리고 지난 3월 뉴 네이트로 새롭게 태어났다.

     

    성장한 포털이 있는 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포털 사이트도 적지 않다. 엠파스는 자연 언어 검색 서비스를 내세웠지만 큰 성과를 올리진 못했고 이후 네이트에 인수됐다. 라이코스 또한 네이트와 합병되며 자취를 감췄다. 홈페이지 기반 인터넷 서비스를 선보인 네띠앙은 2006년 8월 경영난으로 파산 선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미르는 하이텔과 더불어 파란닷컴으로 통합되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의 기능과 역할도 꽤나 달라졌다. 말 그대로 거쳐 가는 검색 사이트 역할에서 벗어나 이제는 뉴스의 집결지, 토론의 장, 만남의 장소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게 됐다.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만큼 포털이 갖는 사회적 책임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베타뉴스 방일도 (idroom@bet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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